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5대 대통령 선거 (문단 편집) ==== [[새정치국민회의]] ==== [include(틀: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 후보 경선)] ---- ||<-4><:>[[대한민국 대통령|{{{#FFFFFF {{{+1 '''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 후보 경선'''}}}}}}]]|| ||<|2><:>'''기호'''[* 경선 후보 간 합의로 기호는 사용하지 않고 정대철 후보를 위칸에, 김대중 후보를 아래칸에 기재하기로 함.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aver?articleId=1997051800239107006&editNo=1&printCount=1&publishDate=1997-05-18&officeId=00023&pageNo=7&printNo=23714&publishType=00010|#]]]||<:>'''이름'''||<:>'''득표수'''||<:>'''순위'''|| ||<:>'''정당'''||<:>'''득표율'''||<:>'''비고'''|| ||<|2> [[파일: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.svg|height=30]] || [[정대철|{{{#373a3c,#dddddd 정대철}}}]](鄭大哲) || 907 || 2위 || || [include(틀:새정치국민회의)] || 21.96% || 낙선 || ||<|2> [[파일: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.svg|height=30]] || '''[[김대중|{{{#373a3c,#dddddd 김대중}}}]](金大中)''' || '''3,223''' || '''1위''' || || [include(틀:새정치국민회의)] || '''78.04%''' || '''당선''' || 이 대선을 앞두고 가장 먼저 후보로 결정된 사람은 바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인데, [[1997년]] [[5월 19일]] 서울 잠실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대의원 투표로 치러진 대선 후보 경선에서 [[정대철]] 전 부총재를 득표율 78.04%로 이기고 무난히 대선 후보가 됐다. 당초 정대철 전 부총재 및 [[김상현(1935)|김상현]] 전 의원 등 비주류계 의원들이 [[김근태]] 전 의원 등 재야 운동권 출신 인사들과 손잡고 경선 흥행을 명분으로 [[http://www.munhwa.com/news/view.html?no=199703314000201|국민경선을 주장]]하였으나 김대중 전 총재의 네번째 도전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던 [[동교동계]]의 강력한 반발에 가로막혀 무산되어 예정대로 대의원들에 의한 경선이 진행되었고 결과는 예상대로 [[https://imnews.imbc.com/replay/1997/nwdesk/article/2003108_30717.html|김대중의 압승]]으로 마무리된 것. 한편 대선 후보 경선과 같은 날, 당 총재 경선도 같이 진행했는데 여기는 김대중 전 총재와 김상현 전 의원의 맞대결이 되었다. 김상현 전 의원은 김대중 전 총재가 대선 후보까지 겸임할 경우 새정치국민회의가 '''김대중 사당'''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며 당권과 대권의 분리를 주장하였지만, 김대중 전 총재는 본인이 출마했던 [[제7대 대통령 선거|1971년 대선]]을 복기하면서 당권과 대권이 분리될 경우 대선 선거 운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고 반박했다.[[https://www.hankookilbo.com/News/Read/199705190067598188|#]] 결국 여기서도 김대중 전 총재가 78.04%를 득표해 승리하면서 당권과 대권을 모두 차지한 상태로 4번째이자 인생 마지막 대선 도전에 나서게 됐다. [youtube(iSObmtGMOac)] 후보 경선을 마친 뒤, 노무현 전 의원은 찬조연설에 나섰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